조선의 외국인 이민자문제, 삼포왜란 역사감상 주절주절

날히스토리아에서 그리던 석전관련 이야기인데요.

태종, 세종때에 집중적으로 육성되었던(육성시킬 맘이 없어도 알아서 육성되던.... ㅡ.ㅡ)
석전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공식적인 전과를 올린 것이
이 삼포왜란이라 합니다.

삼포왜란에 관한 간략한 설명은
http://100.empas.com/dicsearch/pentry.html?i=267245
을 참고하시길 바라며


1400년대, 1500년대 조선에는 사실 외부 이민이 많았습니다.
대왕 세종이라는 드라마에서도 여진 이주민에 대하여 충돌이 일어나는 과정을 다룬듯한데
별로 공감은 못 얻었던듯 합니다만 (피해자의 입장에서만 다뤄지다가 갑자기 가해자가 되어버리면 기분이 좀 그렇긴 합니다)
여하튼 남해의 삼포지역의 일본계 이민의 급증은 사회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문제는 이를 대처하는 조선정부의 자세였는데


처음부터 수세를 하였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고
수가 늘어갔을 때라도 수세하기로 정하였으면 좋았을 텐데 이를 한동안 방기한 것이 문제가 됩니다.

덕택에 무과세로 농사지을 수 있는 경작지가 생겼으니
이를 놓치는 자가 바보죠.



한 가지 백과사전 설명에는 나오지 않는 것이 있는데
이들이 받은 농경지가 '황무지'였다는 사실입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세종대부터 성종에 이르는 기간 동안
조선은 대대적인 농지확보 정책을 펼칩니다.
황무지를 개간하면 처음 일정기간 동안 과세를 하지 않고
지력이 회복되어 수확이 나오면 그 때부터 과세를 하겠다는 것인데

이들의 경우는 오히려 처음에는 과세를 하였다가
그들이 무리를 이루자 면세를 해줍니다. ... 만...
대신...

성종대에 사무역을 강하게 엄단하고 나서고 삼포의 왜인들에 대해 강경책을 펼치고
(세미의 해외방출을 막기위한 발버둥이긴 합니다만.... 일종의 우회적인 방곡령이죠)
삼포 이외로의 지역에 왜인들이 출몰하는 것을 엄격하게 제한해 버렸죠.
뭐 ... 당시 상황으로 볼때 확실히 위기감을 느낄 만 했지만요.
하여튼 성종실록에는 삼포왜인들에 대한 제한을 건의, 또는 시행하는 내용이 꽤 나옵니다.
삼포왜란이 일어난 중종때보다 기사가 더 많네요. ^^;;;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종의 경우는 상업적인 면에는 제동을 걸었으되(어획은 원래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아직까지 그 외 거주민 편의에 대해서는 일절 간섭하지 않아 타협점을 찾은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대마도에 선유사를 보내 소오씨 가문에 삼포의 관리를 맡기는 모습도 보이고 말이지요. (역시 관리를 할거면 중간단계가 있어야 편하다는 이 진리를 알고 계셨던 겁니다. 그리고 거기에 어떤 지위를 가진 이가 적임일지도, 어떤 대우를 해야 할 지도요. 정치적으로 성종은 참 능란한 군주였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성종 7년에는 왜인들의 집에 불이나 70여채가 전소되자 소금, 간장등을 내려 구호할 것을 명했다는 기사가 있네요.
물론 여러 관료들이 '왜인'들을 '독', '흉'에 비유하며 경계를 늦추지 말것을 계속 진언했지만요.


사실 성종도 비슷한 생각이었을지 모르겠지만
당시 일본에 일어난 큰 난리(오닌의 난)에 따라 생각을 고쳐먹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수시로 일본의 정황을 묻고 삼포의 왜인들을 활용할 방안을 생각하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민은 심각했던 모양입니다.

성종 113권, 11년(1480 경자 / 명 성화(成化) 16년) 1월 23일(갑진) 4번째기사
야대에 나아가 강하다가 신하들과 삼포 왜인의 처리 문제를 의논하다

야대(夜對)에 나아갔다. 강(講)하다가 ‘ 당(唐)나라 태종(太宗) 이 항복한 돌궐(突厥) 을 내지(內地)에 거처(居處)하게 하였다.’는 대목에 이르자, 임금이 말하기를,

왜놈[倭奴]삼포(三浦)에 뒤섞여 거주하고 있는데, 지금은 비록 아무런 일이 없지마는 후일의 흔단(釁端)은 진실로 염려할 만한 일이다.”

“하니, 시강관(侍講官) 성숙(成俶) 이 아뢰기를,

김질(金礩) 이 경상도 감사(慶尙道監司)가 되었을 때에 신(臣)이 도사(都事)가 되었습니다. 김질왜인(倭人) 의 호수(戶數)를 검사하려고 했으나, 놀라서 소란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신(臣)으로 하여금 심문(審問)하게 하였는데, 호구(戶口)가 지난 번보다 곱절이나 증가되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만약 쇄환(刷還)한다면 반드시 흔단(釁端)이 발생한 것이고., 이로 인하여 더 퍼져서 후일에는 반드시 우환이 될 것이니, 장차 이를 어찌하겠는가?”

하니, 좌승지(左承旨) 김계창(金季昌) 이 아뢰기를,

“변장(邊將)을 가려서 임명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만호(萬戶)를 가려서 보내더라도 후일에 걱정이 없을 것을 보장(保障)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10책 110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군사-군정(軍政) / *외교-왜(倭)


try{ var treexml = "\n\n\n\n\n\n"; if ( top.leftFrame != null && top.leftFrame.deeptree01 != null ) { var xmlResult = new ActiveXObject("microsoft.xmldom"); xmlResult.loadXML( treexml ); top.leftFrame.xmlPageContext1 = xmlResult; top.leftFrame.deeptree01.Sync(); }} catch(err) {}


(젠장...ㅜ.ㅜ 링크주소가 너무 길어서 드래그 했더니.....)


결국 삼포문제는 오래된 문제거리로
알고보면 언젠가 터질만한 문제로 익어가고 있던 것이지요.
(개인적으로 소오씨 가문의 기록이 있으면 어떻게 볼 방법이 없을지... 으음... 일본 박물관 뒤져야 하나.... 아니 만화는 언제그려...)
또한 1508년에는
관원들이 일본배들의 검사를 위해 무장을 하고 삼포에 진입하자
왜인들이 칼을 뽑아들고 검시관들에게 협박을 가한 사건이 있는데
왜인들이 민가에 방화(왜 했는지는 모르지만)했다고 알려진 사건이 일어나면서 같이 알려지게 됩니다.


그리고 삼포왜란이 일어나지요.
첨사 이우증이 살해당하고 제포가 함락되며
첨사 김세균이 납치됩니다. 동래가 포위되고...

이에 조정은 군을 보내 토벌하였으나
이미 조선 군민 272명이 사망하였다... 라고 나옵니다.
그리고 여기에 투입된 것이 의용군 성격의 석전대였던 것이죠.



이이화 선생의 조선사에는 이런 이야기가 실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삼포 거류민들의 경우
조선인이 아니고 과세대상도 아니었기 때문에
수시로 이들에게서 역을 부과하였습니다.
다만 이전에는 이들에게 역을 부과하더라도 그에 따른 일정의 보수를 주는 것이 관례였건만
신임 부사는 이들에게 일을 시켜놓고 그 '보수'를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일본인들은 항의하기 위해 관가를 찾았고
여기에 첨사는 오히려 관가를 찾은 왜인들을 혼찌검을 내 보내니

이에 왜인들이 불만을 품었다....라는 스토리죠.
(오 데자뷰)



뭐 아무리 천성이 간악한 자들이라 해도 (큭. '천성'이라)
뇌관이 필요한 것이니까요. 그리고 이런 꺼리라면 뇌관은 충분해 보입니다.

물론 정칙적으로 해석하면 
무역금지를 어떻게든 풀어야만 했던 소오씨 가문이 이를 타개하기 위해
벌인 무력행동이라는 설명이 더 이해가 가지만요. 




여하튼 이리해서 삼포의 왜인들이 싹 사라졌냐하면
그건 아닙니다. 물론 이 기회에 농지야 거의 압류되었지만(....뭐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니...쿨럭) 
그래도 삼포의 왜인들은 다시 들어와 살게 되지요.
하지만 예전보다 강화된 압박 정책때문인지
임란 직전까지 아예 관련 기사조차 얼마 없습니다.... 



음.... 실록만으로 보면
천성이 못된 것들이라 숫자가 불어나니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질러
어쩔 수 없이 토벌했다는 이야기이고
어디 빼도박도 못하게 임진년에 전쟁이 일어나버립니다만....


뭐 그러려니 해야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덧글

  • 슈타인호프 2009/02/26 16:02 # 답글

    그 바닷가의 "황무지" 자체가 생겨난 원인 중 큰 부분이 여말 왜구의 활동이겠죠?

    준 대로 받은 거라고 해야 할까나....?
  • 레드칼리프 2009/02/26 16:56 #

    뭐 그렇다고는 해도 원인과 결과로 따지기엔 좀 거리가 있지 않을까요? 물론 왜구의 준동은 용서받지 못할 행동입니다만....
    일단 왜인들에게 당한 횡포가 되었던 왜인들의 항의건 모두 큰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조정에 보고되었다는 것은 .... 쓸데없이 이어지고있는 전통이라고 생각합니다. ㅡ.ㅡ
  • 瑞菜 2009/02/28 13:22 # 답글

    삼포왜란 때 대마도주도 "에라 18 빅장이다!" 마인드로 병력 500을 파견해 줬다더군요.
    대마도에 있는 소씨 가문 서고가 있는데, 거기 뒤져보면 재미있는 것 많을 것입니다.
    대마도 가까운 편이니 잠깐 건너갔다 오세요.
    간다 고서점가 터니까 재미있는 고서들이 많더군요. 읽을 수가 없지만.
  • 레드칼리프 2009/02/28 16:42 #

    켁, 외국입니까. 무립니다. 그건. 지리적 거리가 가깝다고해도 비용과 심리적 거리라는 문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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